1946~1969

한국전쟁과 집결지의 형성 

1950-1960년대 수많은 피난민과 이촌향도민이 수원역 일대에 몰려들면서, 매산로 1가와 고등동 경계에 형성된 육교마을과 동산마을에는 수원역 성매매집결지가 만들어진다. 1960년대 수원역 주변에는 완행열차에서 내린 가난한 사람들이 저렴한 가격에 이용할 수 있는 숙박시설인 하숙이 많았다. 숙박비보다 성매매 알선을 통해 얻는 이익이 커지면서 수원역 주변 무허가 하숙집들은 성매매에 더 주력하게 되었고, 성매매 여성을 고용하여 업소를 운영하기에 이른다. 이에 1960년대에 육교마을과 동산마을 일대에 집촌화된 성매매집결지가 형성되었다.

  • 11946 미군정 「부녀자의 매매 또는 그 매매계약의 금지에 관한 법령」 공포·시행
    군정법령 제70호 발포 전후 수원 기생은 8~9명으로 집계
  • 21947 「공창제도등폐지령」 공포 
  • 31946 - 1949 매산로 1가와 고등동 경계에 동산마을, 육교마을 피난민촌 형성 
  • 41952 포천지구의 성매매 여성 200명, 수원역전수용소에 수용 후 귀향 조치
  • 51953 휴전협정 체결 
  • 61955 접대부 성병 수진자 (위안부 1,309명, 접대부 57명, 기타 91명) 추정 
  • 71956 '창부' 성병검진 실시(직업보도 또는 귀가조치) 

수원역은 군병력 이동의 주요 거점이 되었으며 수원역 인근에 피난민촌이 형성되었다. 피난민촌 입구에는 미군 보급창고와 군부대 막사가 있었고, 이때 이미 군인들을 상대로 하는 성매매가 이루어졌다.

  • 11960년대 이촌향도민의 유입으로 수원시 인구증가
    육교마을, 동산마을 일대에 집촌화된 성매매 집결지 형성
  • 21961  「윤락행위등방지법」 시행 
  • 31962 ‘윤락행위'를 묵인하는 특정지역 설치(전국 104곳)
  • 41967 경기도청 수원으로 이전 

고등동의 본격적인 '개발'의 변화는 1967년 경기도청의 이전과 1974년 서울-수원 구간 전철화로 인한 수원역 일대의 개발과 더불어 시작된다. 고등동은 다양한 계층을 수용하기 위한 목적의 다가구 다세대 주택들이 난립했고, 대규모 '집창촌'이 형성되었다.  

  • 1출처 <수원역 성매매집결지 폐쇄과정 백서> 2021, 수원시 
  • 2출처<수원시 고등동지> 2012, 수원박물관 
  • 3사진제공: 수원박물관